배고픔이 일상이었던 1960년대 한국, 한 그릇의 꿀꿀이죽을 보고 시작된 혁신이 오늘날 전 세계를 사로잡은 K-푸드의 대표주자가 되었습니다. 전중윤 회장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우지파동의 위기를 딛고 불닭볶음면으로 세계 시장을 정복했습니다. 정직과 신용이라는 변치 않는 기업 철학으로 일군 삼양라면의 성공 스토리를 살펴봅니다.

배고픈 시대, 꿀꿀이죽에서 시작된 라면 혁명
1950년대 말, 서울 남대문 시장 골목길. 당시 제일생명보험 사장이었던 전중윤은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끓인 이 죽은 배고픈 노동자들의 한 끼 식사였습니다.
전중윤 회장은 직접 꿀꿀이죽을 맛보았는데, 그 안에서 깨진 단추와 담배꽁초까지 나와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국민이 배불러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식족평천(食足平天)'의 기업 이념을 세웠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일본 출장에서 맛본 라면이었습니다. 기름에 튀긴 마른 국수는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었고, 한국에는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쌀은 부족해도 밀가루는 미국 원조로 넘쳐나지 않는가!"
이렇게 전중윤 회장은 안정된 보험회사 사장 자리를 과감히 내려놓고, 라면 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5만 달러로 시작한 한국 최초의 라면
라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전중윤 회장은 일본에서 라면 제조 기계를 들여올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달러는 정부가 엄격히 관리하고 있어 개인이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그는 결국 당시 실세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밀가루 200g으로는 얻을 수 없는 500칼로리와 18g의 단백질, 그리고 지방을 라면 200g 한 봉지로 섭취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면 시제품을 맛본 김종필은 그 자리에서 지원을 약속했고, 미 농무부의 지원을 받아 5만 달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전중윤 회장은 일본 묘조식품의 회장을 찾아가 라면 제조기계 판매와 기술 전수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전중윤 회장의 인품과 진정성에 감동한 일본 회장은 전중윤 회장의 진정성에 감동받아 기계 판매는 물론, 라면 제조의 핵심인 스프 제조법까지 전수해주기로 했습니다. 1963년 9월 15일, 서울 하월곡동에서 마침내 국내 최초의 라면 생산이 시작되었고, 가격은 10원이었습니다.
직접 만들고 직접 마케팅한 라면의 아버지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을 때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생소한 음식이었던 데다, '삼양'이라는 브랜드명도 논란이 됐습니다. 당시 일본 점령기에 쌀을 수탈했던 회사 '미쓰비시'의 로고와 비슷하다는 이유였죠. 심지어 어떤 소비자들은 라면을 생으로 씹어 먹기도 해 당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전중윤 회장은 직접 홍보에 나섰습니다. 손수 라면을 끓여 나눠주는 시식 행사를 열고, 직원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라면 조리법을 알렸습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65년부터 삼양라면의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면은 우리 국민의 생명 보험입니다. 한 끼 라면이면 누구나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죠."
1965년 정부의 혼분식 장려 운동과 맞물려 삼양라면은 3년 만에 월 240만 봉지를 판매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매출은 첫해 3천만 원에서 1968년에는 35억 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시장 점유율은 80%를 넘어섰습니다.
위기와 도전: 우지파동과 라춘사건
기업의 존폐를 위협한 우지파동
삼양라면의 전성기는 1989년 '우지파동'으로 급격히 추락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라면 업계가 식용 우지(소기름) 대신 공업용 우지를 사용했다고 보도했고,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신뢰는 무너졌습니다.
사실 이는 오보였습니다. 당시 식품 위생법상 우지 관련 규정은 불명확했고, 사용된 우지는 식용으로 정제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중윤 회장은 소송이나 반박 없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사과와 함께 전량 회수를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삼양라면은 시장 점유율이 급락해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라춘사건으로 새로운 인연이 피어나다
1998년 '라춘 사건'은 삼양라면에 따뜻한 관심을 가져온 흥미로운 에피소드입니다. 한 소비자가 라면 봉지에 유통기한 대신 '라춘'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의했고, 이는 익산공장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라춘 기장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결국 삼양식품은 '라춘 기장의 라면'이라는 신제품을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글로벌 성공의 아이콘, 불닭볶음면
2010년 전중윤 회장이 물러난 뒤, 그의 며느리 김정수 부회장이 경영을 맡게 됐습니다. 김 부회장은 매운 맛 볶음밥에서 영감을 얻어 '불닭볶음면'을 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외국인들의 '불닭볶음면 도전' 영상이 SNS에서 바이럴 히트를 치면서 글로벌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습니다.
2019년 삼양식품의 해외 매출은 처음으로 국내 매출을 초과했고, 2023년에는 해외 매출이 1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주가 또한 10배 이상 상승하며 라면 회사 중 시가총액 1위를 달성했습니다.
중생과 공존: 전중윤 회장의 기업 철학
전중윤 회장은 '중생(衆生)과 공존'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회사가 성장할 때도 주변의 철거민들을 우선 채용하는 원칙을 세우고, 협력업체와의 상생을 중요시했습니다.

"한 기업이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선의의 경쟁과 공존의 정신으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한 그릇의 라면이 바꾼 세상
한때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줄을 섰던 한국인들은 이제 불닭볶음면을 먹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들었습니다. 60년 전, 한 그릇의 라면으로 시작된 삼양식품의 여정은 오늘날 K-푸드의 글로벌 성공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전중윤 회장의 '식족평천'과 '중생과 공존'이라는 정신은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삼양라면의 60년 역사는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입니다.
하루 세 끼 라면만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라면은 이제 우리 식탁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한 그릇의 라면에서 시작된 이 특별한 여정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All About World News 세상의 모든 뉴스를 리뷰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중 무역전쟁의 새로운 국면: 중국, 아르헨티나 대두 9억 달러 구매 결정 (1) | 2025.05.16 |
---|---|
한의학의 미래, AI가 혁신하는 진료 교육 - Gen-SynDi 시스템으로 변증 역량 강화 (0) | 2025.05.14 |
차세대 사이버 보안의 미래, 엑스게이트 양자암호 VPN 기술 심층 분석 (0) | 2025.05.13 |
에이피알, 1분기 '역대 최대' 실적으로 매출 1조원 클럽 진입 눈앞 (0) | 2025.05.13 |
제주 해녀의 특별한 유전자: 바닷속 생존을 돕는 놀라운 변이의 비밀 (0) | 2025.05.13 |